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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수학) 무한에도 크기가 있을까? 칸토어의 대각선 논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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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수학) 무한에도 크기가 있을까? 칸토어의 대각선 논법.

미이루우나아무 2021. 9. 30. 00:33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수학은 복잡하고 어려운 학문이다.

 

많은 일베충들 역시 학창 시절 수학에 좌절하곤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좆같은 학문도, 처음에는 단순한 모양이었다.

 

 

 

 

 

사과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갯수를 세는 것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셈도 보기엔 별것 아니지만 사실 고도의 추상화 과정이 동반된 일이다.

 

사과 하나와 돌멩이 하나, 저기 보이는 늑대 한마리와 내 옆에 동료 남성 한명. 그리고 낮의 태양과 저녁의 달. 

 

서로 달라보이는 이것들에서

 

 

 

 

 

 

 

 

누군가가 '1'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낸다. 이것이 수학의 시작이다.

 

아, 이름이 남지 않은 위대한 수학자여!

 

 

 

그 이후로 수학은 스스로의 외연을 넓혀가며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실수를 넘어 복소수까지 수 체계를 완성시켰고, 4차 이하의 방정식을 풀 수 있게 되었으며 미분과 적분으로 물리 현상을 더 잘 알수 있게 되었다.

 

수학은 그 자체로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처럼 보였고, 다른 학문들에게 있어선 최고의 방법론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만능처럼 보이는 수학이었지만 1800년대 후반엔 수학자들이 건드리기 꺼려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무한'이었다.

 

다루기 꺼려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무한만 개입되면, 무언가 심각하게 직관에 어긋나는 일들이 생겼다.

 

가장 유명한 예시는 제논의 역설이다.

 

 

 

발 빠른 아킬레우스 100m 앞에서, 거북이가 출발한다. 아킬레우스가 당연히 더 빠르므로 거북이를 따라잡아야할 것 같다.

 

그렇지만 제논은 말한다. 

 

"아킬레우스는 절대로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다! 아킬레우스가 100m를 50m까지 좁히면 거북이도 조금 더 전진한다. 50m를 25m까지 좁힐 때에도 그렇다.

 

이렇게 무한히 반복되므로 아킬레우스는 절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거짓임을 안다. 하지만 역설이 제시되었을 시기인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 역설은 매우 골치 아픈 문제였다.

 

또 다른 유명한 사례를 보자. 지름이 다른 바퀴의 이야기이다.

 

 

지름이 큰 바퀴와 작은 바퀴를 중심이 같게 고정시키고, 한바퀴를 굴린다.

 

 

그러면, 바퀴가 지면과 닿은 부분의 궤적은 이렇게 그려질 것이다. (작은 바퀴는 실과 닿은 부분) 

 

한바퀴를 굴렸으므로 궤적의 길이는 다들 알다시피 2 곱하기 파이 곱하기 반지름 R...인데 뭔가 이상하다.

 

작은 바퀴와 큰 바퀴가 지나간 궤적의 길이가 같다. 이건 다른 말로하면 두 바퀴의 반지름이 같다는 이야기이다. 어찌된 일일까?

 

 

원이 아니라 육각형을 굴려보면 알 것 같기도하다. 

 

바깥의 큰 육각형의 변이 땅과 계속 맞닿아 있는 동안, 안쪽의 작은 육각형은 조금씩 건너 뛰는 간격이 있다.

 

육각형을 팔각형으로, 팔각형을 이십각형으로 늘려나간다면 저 '간격'은 줄어든다. 원을 '무한각형'으로 생각한다면 틈은 메워져 직선이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무한이 개입되면 뭔가 상당히 귀찮은 일들이 발생하곤 했다. 개중에는 위의 예시처럼 설명이 가능한 것도 있었지만

 

설명하기 힘든 것도 많았다. 그래서 수학자들은 자연스레 무한을 다루는 것을 꺼려하곤 했다.

 

 

무한은 인간 인식의 범위를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무한은 영원이요, 인간은 찰나였다.

 

무한을 아는 것은 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가끔은 용기 있는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법. 무한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수학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현대 집합론의 아버지인 '게오르크 칸토어'이다.

 

그는 어떻게 무한에 접근했을까? 놀랍게도 매우 단순한 발상이었다. 뭐냐하면

 

 

 

위에서 봤었지?

 

바로 개수를 세는 것이다! 그는 수학이 처음 탄생했을 때로 돌아간다. 무한대를 연구하기 위해 0으로, 아니 1로 돌아간 것이다.

 

 

 

갈릴레오는 말했다. '일대일 대응을 할 수 있으면 두 집합은 크기가 같아.'

 

더 쉽게 말해보자.

 

 

어릴 때 운동회에서 이런 종목에 참가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양 팀이 저렇게 높게 메달린 바구니 안에 공을 던지고, 제한시간이 끝난 뒤에 공을 더 많이 넣은 팀이 이기는 게임말이다.

 

이것의 승패를 결정할 때 어떻게했는지 기억하는지? 대부분의 경우에 양쪽 바구니에서 공을 '동시에 하나씩' 꺼낸다. 

 

그렇게 하나하나 꺼내다가 더 이상 꺼낼 공이 없는 쪽이 지는 것이다.

 

집합 사이의 일대일 대응이란 이런 것이다.

 

양 집합(바구니)에서 원소(공)를 동시에 하나씩 꺼낸다. 꺼낼 원소(공)가 먼저 떨어지는 쪽이 크기가 작은(지는) 것 이다.

 

동시에 떨어진다면? 크기가 같은(비긴) 것이다.

 

이것이 갈릴레이의 말이었고, 칸토어에게 아리아드네의 실이 되었다. 칸토어는 한발 나아갔다.

 

 

모든 자연수(1, 2, 3, ....)와 모든 짝수(2, 4, 6, ...) 중에서 뭐가 더 많을까? 자연수 안에 짝수가 있으므로 자연수가 더 많지 않을까? 아니다.

 

자연수와 짝수는 그 갯수가 같다. 위의 사진처럼 자연수 바구니에서 숫자 하나를 꺼내면, 나는 짝수 바구니에서 똑같이 숫자 하나를 꺼낼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위와 같다. 누군가 어떤 자연수 n을 꺼낼 때마다 나는 짝수 2n을 꺼낼 수 있다. 그래서, 자연수와 짝수는 그 갯수가 같다.

 

비슷한 방법으로 자연수와 홀수도 그 갯수가 같다. 정수와 자연수의 갯수가 같다는 것 역시 유도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 여기까진 좋다. 그럼 유리수는 어떨까?

 

 

먼저 첫째줄엔 분자가 1인 분수꼴 형태의 수를 모두 적는다. 두번째 줄엔 분자가 2, 세번째 줄엔 분자가 3... 계속한다.

 

이렇게하면 모든 유리수를 적게 된다. (사실 사진엔 0이 빠져있지만 별 문제는 아니다)

 

이제 여기에 화살표 방향대로 순서를 주면 자연수와 일대일 대응이 된다. (그림을 살짝 기울여 삼각형 형태의 숫자 집합으로 보라)

 

 

 

이렇게.

 

즉 유리수는 자연수와 개수가 같다.

 

그런데 이거, 왠지 계속하다보면 결국 모든 무한집합들의 크기는 같다는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닐까?

 

칸토어는 이제 실수 전체와 자연수를 비교해보기로 한다. (위의 다큐에는 이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본격적인 논의 전에, 다음과 같은 사실 하나를 먼저 증명해보자.

 

"0보다 크고 1보다 작은 모든 실수의 집합(구간으로 나타내면 (0, 1))은 실수 전체의 집합과 크기가 같다."

 

이것을 보이려면 (0, 1)과 실수 전체 사이의 일대일 대응을 만들어야하는데, 삼각함수를 이용하면 간단하다. 

 

 

즉 0과 1사이의 어떤 실수 x를 바구니에서 꺼낼 때마다 나는 tan (x-1/2)*파이를 꺼내면 된다. 따라서 (0, 1)은 실수 전체와 크기가 같다.

 

이제 자연수 전체와 (0, 1) 사이의 일대일 대응만 찾으면 된다. 찾을 수 있을까? 

 

잠시 스크롤의 여유를 줄테니 고민해보자.

 

 

 

 

 

 

 

 

 

 

 

 

 

 

 

 

 

 

 

 

 

 

 

 

 

 

 

 

 

 

 

아마 못찾았을 것이다.

 

그럼, 한번 찾았다고 쳐보자. 한 번 둘의 크기가 같다고 가정해보는거다. 그러면 자연수와 실수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있을 것이다.

 

 

 

가령 이런 식으로 (단, 여기서 유한소수, 즉 0.5 같은건 0.49999......로 표기하기로 한다.)

 

 

 

그런데 짱구를 잘굴려보면, 우리는 저 대응 관계에 없는 새로운 실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방법이 그 유명한 칸토어의 '대각선 논법'인데 간단히 알아보자. (칸토어의 오리지널 버전과는 표기법이 조금 다르지만 원리는 같다.)

 

우리는 첫번째 숫자의 소수점 아래 첫째 자리, 두번째 숫자의 소수점 아래 둘째 자리, 세번째 숫자의 소수점 아래 셋째 자리...... 

 

이렇게 계속해서 하나씩만 숫자를 가져와 새로운 숫자를 만들 수 있다. 위 예시에서는 0.859185709......가 될 것이다.

 

여기서, 각 단계의 숫자에 1 씩만 더해보자. 즉 1은 2로 2는 3으로... 9는 0으로 바꾸기로하자. 그러면

 

0.859185709.....라는 숫자는 0.960296810....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숫자는 우리가 만든 대응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숫자다.

 

왜냐하면, 첫번째 숫자와는 첫번째 자리가 다르고, 두번째 숫자와는 두번째 자리가 다르고.... n번째 숫자와는 n번째 자리가 다르다.

 

아래 그림을 보면 좀 더 명확하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숫자는, 여전히 (0, 1)에 있는 실수인데도 자연수와 대응시킨 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실수의 집합은 자연수의 집합보다 크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결과였지만

 

 

 

그래서 동시대 학자들에게 얼른 받아들여지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칸토어 본인의 말년은 상당히 불운했고, 결국 1918년 세상을 떠났다.

 

 

 

"수학의 본질은 그 자유로움에 있다." - 게오르크 칸토어